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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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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의 심층전시리뷰] 한재철 초대개인전《RAW & RAW》- 날것과 자각 사이의 인간론    네이버 구글

인문학은 오래전부터 '날것'을 문명 이전의 상태가 아니라 문명이 끊임없이 되돌아가 확인해야 할 출발점으로 읽어왔다. 한재철(JC.KHAN)의 초대개인전 《RAW & RAW》는 이 오래된 화두를 얼굴과 항해라는 두 개의 이미지에 실어, 해체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자각에 이르는가를 묻는다. 갤러리파이 영종에서 만난 이 전시를, 인문학과 통섭적 아트커뮤니케이션의 시각에서 정밀하게 짚어본다.
이상민   승인 2026.07.16 10:37  |  최종 수정 2026.07.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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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 문명이 되돌아가야 할 자리

'날것(raw)'은 익지 않은 음식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문학에서 날것이란 사회와 문화가 만든 규칙에 아직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 존재가 가장 원초적인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날것과 익힌 것』에서 날것을 자연에, 익힌 것을 문화에 대응시켰다. 불로 음식을 익히는 행위는 단순한 조리가 아니라 자연을 인간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상징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정보가 편집되고 감정이 관리되며 이미지가 보정되는 오늘, '날것'은 오히려 진정성(authenticity)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완벽함보다 결함이, 연출보다 우연이 신뢰를 얻는 시대다. 날것은 미완성이 아니라 아직 닫히지 않은 가능성이며, 사회적 역할과 타인의 기대가 덧씌워지기 이전의 나를 마주하는 경험이다. 나는 이 화두를 안고 영종도로 향했다. 바다 냄새를 따라 들어선 갤러리파이 영종의 벽면에는 'RAW & RAW'라는 제목이 걸려 있었다. 같은 단어를 두 번 겹쳐 씀으로써, 작가는 재료의 날것과 내면의 날것, 두 겹의 본질을 동시에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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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러리파이 영종 초대개인전 《RAW & RAW》아티스트 토크에서 인사말을 전하는 한재철 작가



얼굴, 두 개의 인문학적 계보 사이에서

Human〉과 〈Face〉 연작 앞에서 그 선언은 구체화된다. 반복된 붓질과 해체·응축을 오가는 화면은 특정한 초상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이 퇴적된 지층이다. 얼굴을 다뤄온 인문학의 두 계보가 여기서 겹쳐 든다. 레비나스는 얼굴을 '타자성이 나에게 도래하는 자리'라 불렀다얼굴은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윤리적 요청이라는 것이다. 반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을 전혀 다르게 읽었다. 그들에게 얼굴이란 순수한 자연이 아니라 권력과 의미화가 작동시키는 하나의 '기계(machine)'. 사회는 신체를 얼굴로 코드화함으로써 개인을 식별 가능하고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한재철의 얼굴들은 이 두 사유 사이 어디쯤에서 흔들린다. 캔버스 위의 얼굴은 타자를 향한 절실한 호소이면서, 동시에 그 얼굴을 그토록 반복해서 해체해야만 했던 이유즉 얼굴이 이미 하나의 정해진 틀로, 하나의 명령으로 굳어 있었다는 사실을 함께 폭로한다. 이 작업은 얼굴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되기 이전의 얼굴, 아직 코드화되지 않은 얼굴의 잔여를 붙잡으려는 시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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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철(JC.KHAN)의 초대개인전 《RAW & RAW》 전시 전경


베이컨, 게니, 그리고 자청한 붕괴

얼굴을 다뤄온 동시대 화가들과 나란히 놓아보면 한재철의 위치는 더 선명해진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비명 지르는 얼굴, 애드리언 게니의 물감을 뭉개고 녹여낸 얼굴 앞에서 나는 언제나 불안과 잔혹을 먼저 느꼈다. 그런데 한재철의 얼굴들 앞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 분명 해체되고 뒤틀려 있음에도, 그 화면에서 올라오는 것은 위협이 아니라 반성이며, 잔혹이 아니라 위로다.

그 차이는 이런 데서 비롯될 것이다. 베이컨과 게니의 얼굴이 '외부의 폭력과 역사가 인간에게 가해진 결과'를 증언한다면, 한재철의 얼굴은 스스로 안으로 파고들다가 자청해서 겪는 붕괴에 가깝다. 작가 스스로도 자신을 들여다볼수록 안쪽으로 갇히는 것을 느꼈고, 그 갇힘의 끝에서 다시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고 밝힌 바 있다. 스스로 갇히고, 스스로 깨지고, 그 깨짐 속에서 다시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는 자발적인 과정이 자발성이야말로 같은 해체와 왜곡을 다루면서도 한재철의 얼굴을 잔혹이 아닌 성찰로, 불안이 아닌 위로로 읽히게 만드는 결정적인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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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철(JC.KHAN)의 초대개인전 《RAW & RAW》 전시 전경      


얼굴 = 항해, 하나의 존재론적 등식

작가가 작업노트에 남긴 문장이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열쇠말이 된다. "인간(휴먼·페이스)과 항해(파도)는 결국 하나의 서사다." 얼굴과 바다를 병치하는 이 사유는 은유를 넘어선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론적 등식이다. 얼굴 = 항해. 표정의 굴곡은 파도의 굴곡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전시장 안쪽, Voyage〉와 〈Wave〉 연작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이 등식이 시각적으로 완성된다. 차콜과 먹으로 그려진 〈Voyage〉 연작은 흑백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돛과 형상이 서로를 침식하며 뒤엉킨다. 대형 회화 〈Wave20250224(30)〉를 비롯한 파도 연작 앞에 서면, 관람자는 어느 순간 '보는 사람'에서 '건너는 사람'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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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개막일 아티스트토크에서 작가는 오래된 중국 고전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동서남북이라는 방위조차 자기 자신이 존재하기에 비로소 성립하는 관계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항해의 목적지를 묻는 질문에 그는 담담히 '목적지는 없다'고 답했는데, 이는 방향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가늠하는 주체,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모든 항해에 선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파도 속에서 자신을 세웠다가 소멸시키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는 존재작가가 말한 이 불안정한 항해자야말로, 자각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신의 좌표를 확인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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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철(JC.KHAN)의 초대개인전 《RAW & RAW》 전시 전경


통제된 항해, 시대가 새긴 표면

최근 작가는 이 네 계열을 더 예리하게 규정했다. "항해는 통제된 이동이고, 파도는 반복되는 명령이며, 휴먼은 그 명령을 수행하는 몸이고, 페이스는 그 모든 결과가 응축된 표면이다." 이는 낭만적 항해기가 아니라 하나의 진단서다. 우리가 자유의지로 나아간다고 믿는 항해가 실은 이미 짜인 파도의 리듬사회가 반복해서 요구하는 명령의 리듬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 모든 압력이 마지막에 응축되는 표면이 바로 얼굴이라는 것이다. 이 순간 얼굴은 더 이상 개인의 서정적 자서전이 아니라, 시대가 개인의 신체 위에 새겨 넣은 흔적의 총합이 된다. 작가는 스스로 밝히듯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작동 방식'임을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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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철(JC.KHAN)의 초대개인전 《RAW & RAW》 전시 전경

경영과 전략을 오래 연구해 온 나의 눈으로 보자면, 이 그림들은 뜻밖에도 조직과 개인이 마주하는 '통제와 자율성'의 초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삶에서든 조직에서든 매끈하게 가공된 답과 정해진 절차를 원하지만, 정작 그 반복되는 명령의 파도 안에서 우리 각자의 얼굴이 어떻게 마모되고 있는지는 좀처럼 돌아보지 않는다. 한재철의 회화는 바로 그 마모의 표면을 확대경처럼 들이민다.

결국 항해란 시간의 흐름 그 자체일 것이다. 나 역시 요즘 부쩍 얼굴에서 그 흐름을 마주한다. 늘어나는 주름, 희끗해진 머리카락, 조금씩 넓어지는 이마세상의 수많은 파도를 헤치며 건너온 시간의 기록이 고스란히 얼굴 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한재철의 화면 앞에서 나는 문득 나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해체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을 항해해가야 하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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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철(JC.KHAN)의 초대개인전 《RAW & RAW》아티스트 토크의 진행을 맡은 김혜진 디렉터(갤러리파이 영종)

 

맺으며두 개의 질문

이 전시의 제목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RAW를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말함으로써, 작가는 얼굴의 날것과 바다의 날것, 정지된 존재의 날것과 흐르는 시간의 날것을 동시에 겹쳐 놓는다. 작가는 결코 손쉬운 위로나 저항의 구호를 그리지 않는다. 그의 화면은 인간을 구원하지도, 고발하지도 않은 채 다만 두 개의 질문만을 조용히 되돌려 놓는다. 이 반복되는 항해 속에서 우리는 정말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얼굴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개막일 아티스트토크에서 김혜진 디렉터가 이끈 대화는 이 질문들에 다가서는 유익한 통로였고, 이런 밀도 있는 담론을 두 차례에 걸쳐 초대전으로 성사시킨 갤러리파이 영종 공영순 대표의 올곧은 기획에도 지지를 보낸다. 바다와 접한 갤러리파이 영종에서, 얼굴이라는 항해도 한 장을 오래도록 들여다본 하루였다. 그 항해도는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이 시대를 건너는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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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철(JC.KHAN)의 초대개인전 《RAW & RAW》 아티스트 토크에 참석한 관람객 단체 사진 


전시명    한재철(JC.KHAN) 초대개인전 RAW & RAW

기간        2026 7 15() ~ 8 15()

장소        갤러리파이 영종 (인천광역시 중구 큰말로 69, 3)

아티스트 토크      2026 7 15() 오후 4, 진행 · 김혜진 디렉터(갤러리파이 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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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재철 작가와 대담을 나누는 필자


  이상민

미술인문학자,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이노바랩() 대표. 연세대학교 수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전공. 《통섭미술관기행》,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등 통섭미술 및 경제경영 시리즈 저술. 한국구상조각회, 양평아트로드포럼 기획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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