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이 기억하고, 불이 새기고, 연기가 증언한다 - 문민순 개인전 《사라짐 너머의 : 스며든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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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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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기억하고, 불이 새기고, 연기가 증언한다 - 문민순 개인전 《사라짐 너머의 : 스며든 흔적》    네이버 구글

최고관리자   승인 2026.05.04 03:43

문민순 개인전 《사라짐 너머의 : 스며든 흔적》
Au-delà de la disparition : Trace imprégnée
2026.4.25 — 5.24 | 
영은미술관 제2전시장 | 
2026 영은아티스트프로젝트 13기




오프닝에서 전시 작품을 설명하는 문민순 작가
오프닝에서 전시 작품을 설명하는 문민순 작가

경기 광주 영은미술관 제2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은 묘한 정적과 마주한다. 화려한 색채도, 요란한 설명도 없다. 벽면 곳곳에 조용히 박혀 있는 검고 묵직한 세라믹 오브제들, 그리고 거대한 한지 위에 떠오른 달항아리의 형상. 그 앞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 대신 눈으로 오래 머문다. 조각가 문민순(b.1961)의 개인전 《사라짐 너머의 : 스며든 흔적》이다.


"30년을 연기와 함께 살았습니다"

5월 2일 열린 오프닝에서 문민순은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작업을 설명했다. "제가 연기 작업을 시작한 것은 한국에서부터입니다. 거의 30년이 됐습니다." 간결한 한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서울과 리옹과 파리를 오간 긴 시간이 압축되어 있었다.

1961년생인 그는 홍익대학교 도예과(1982년 졸업)에서 흙과의 첫 대화를 시작했다.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리옹 국립미술학교 조소과(DNAP, 1992년 졸업)를 마쳤고, 파리 1 팡테옹-소르본 대학교에서 조형예술 석사(2008년)와 박사과정(2015년 수료)을 밟았다. 서울에서 도예의 감수성을 키우고 리옹과 파리에서 현대 조형의 이론적 언어를 익힌 30여 년의 학문적 여정은, 그의 작업이 동양의 흙 감각과 서구의 관념 미학 사이 어딘가에 정확히 자리 잡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숨의 시간> 2023-2026, Clay, smoke-fired, Dimensions variable
<숨의 시간> 2023-2026, Clay, smoke-fired, Dimensions variable

개인전은 이번이 사실상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귀환이나 다름없다. 1998년 부산 NC Gallery와 1999년 대전시민회관에서 〈설치, 시간의 이야기〉로 국내 무대를 밟은 이후, 2012년 파리 89 갤러리에서 〈Contemplation〉을 개최했지만 한국에서의 개인전은 오랜 공백이 있었다. 그 사이 그는 파리 시테 인터내셔널 데자르, 브르타뉴 프랑수아즈 리비넥 갤러리, 파리 에스파스 24 보부르 등 유럽 주요 기관을 무대로 그룹전 활동을 이어왔고, Art Paris, Asia Now, Fine Arts Paris & La Biennale 등 국제 아트페어에도 꾸준히 얼굴을 내밀었다. 작품은 전주문화재단과 파리 세르누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2026년 영은미술관 레지던시 입주와 함께 마련된 이번 전시는, 그 긴 여정의 한국적 결산이다.

흙, 불, 연기 — 세 원소가 만드는 존재의 철학

문민순의 작업을 이해하는 열쇠는 세 가지 원소에 있다. 흙, 불, 그리고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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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숨> 일부 2010-2026, Clay, smoke-fired, Dimensions variable


흙은 인류가 가장 오래 손에 쥐어온 물질이다. 구약성경은 인간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고 선언하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흙을 만물의 근원적 원소로 꼽았다. 문민순이 흙의 표면을 손으로 끊임없이 문지르고 연마하는 행위는 단순한 성형(成形)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손이 기억하는 감각의 시간이며, 흙이라는 물질이 인간의 손길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형태를 찾아가는 관계의 과정이다. 손의 온기가 흙에 전해지고, 흙의 저항이 손에 되돌아오는 그 교환의 시간 속에서 작품은 시작된다.

불은 변환(變換)의 상징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훔쳐왔다는 불은 날것을 익히고, 금속을 녹여 다시 빚고, 흙을 단단한 그릇으로 바꾸는 연금술적 힘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불의 정신분석』에서 불이 인간의 상상력을 가장 깊이 자극하는 원소라고 했다 — 불은 파괴하면서 동시에 창조한다. 문민순의 가마 속 불도 마찬가지다. 그 불은 흙으로 빚은 형태를 영원히 굳히는 동시에, 표면 위에 우연의 흔적을 새겨 넣는다.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이, 예술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연기. 연기는 세 원소 중 가장 모호한 존재다. 불과 공기 사이 어딘가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연기는 물질도 아니고 완전한 비물질도 아닌, 경계의 존재다. 그런데 문민순의 작업에서 연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마 안에 갇힌 연기는 흙의 미세한 기공(氣孔) 속으로 깊이 스며들어 검은 탄소의 층위로 영구히 각인된다.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가장 영속적인 흔적을 남긴다는 이 역설이,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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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숨> 일부 2010-2026, Clay, smoke-fired, Dimensions variable


작가는 이 세 원소의 관계를 오프닝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검은 색은 어떤 상상력을 갖게 하는 색이기도 하고, 어떤 것을 가리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고 — 굉장히 상상력을 담을 만한 색입니다." 연기가 흙에 스미는 그 찰나는 작가조차 볼 수 없다. 가마 문을 열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표면은, 불과 연기가 흙과 나눈 비밀스러운 대화의 결과다. 가마 속 불과 연기가 남긴 재와 흔적은 단순한 물질적 잔재가 아니라, 한때 이 자리에서 무언가가 타오르고 스미고 변환되었다는 존재의 증언이다.

기하학의 기원 — 열네 살 소녀가 본 콘크리트 건물

작가의 조형 언어는 뜻밖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오프닝에서 그는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제가 청소년기 때 처음으로 높은 건물을 본 인상이 굉장히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그 인상을 가지고 지금까지 계속 기하학적인 형태로 반복적으로 해오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자라 서울에 처음 올라온 열네 살 소녀가 2층, 3층, 4층 건물의 높이에 압도되었던 그 충격이, 수십 년을 가로질러 지금의 직육면체와 정육면체, 기둥 형태의 세라믹 오브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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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숨> 2010-2026, Clay, smoke-fired, Dimensions variable


이번 전시에서 벽면에 설치된 연작 〈그림자의 숨〉은 그 기하학적 집념의 현재형이다. 정육면체 세라믹 블록들이 벽에 박혀 각각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그림자마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작가는 "입체로 만든 것이 원근법적인 형태로 보여지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 3차원의 물질이 2차원의 그림자와 공명하며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월하리(月下里)의 감각 — 달빛을 품은 이름

이번 전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圓形)의 달항아리 이미지는, 작가의 이름과 고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가 사는 고향의 마을 이름이 월하리입니다. 달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저희 마을에는 높은 산이 없고 작은 동산이 있고 넓은 평야가 있는 지대입니다. 밤 동안에 오랫동안 달이 비춰지고 있고, 유난히 달이 있을 때는 밝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이 문(Mo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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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그림자 202401> 2024-2026, Pigment print on Hanji, 127x162cm, Ed. 1/1


달빛이 오래 머무는 마을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성(姓)마저 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전시작 〈숨 쉬는 그림자 202401〉과 〈숨 쉬는 그림자 202503〉은 작가가 직접 제작한 달항아리를 촬영해 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트로 옮긴 작품이다. 오프닝에서 그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두 가지 상태가 항상 공존하고 얽혀 있다"고 말했다 — 세라믹 실물과 한지 위 이미지 사이에서, 물질과 흔적의 경계가 다시 한번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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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그림자 202503> 2025-2026, Pigment print on Hanji, 80x97cm, Ed. 1/3


말러의 교향곡과 관람자의 숨소리

공간 전체가 하나의 악보처럼 설계되었다는 점도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작가는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에서 얻은 감각을 이 공간에 설치해 보려고 했습니다. 상승과 수평적인 시간과 멈춘 떨림이 있는 흐름, 그리고 응집이 흩어지고 다시 응집하는 리듬을 생각하며 했습니다"라고 밝혔다. 삶과 죽음, 상승과 하강을 거대한 오케스트라로 직조한 말러의 음악적 리듬이 전시 공간의 여백과 오브제 배치에 녹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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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선> 2026, Clay, smoke-fired, Dimensions variable

전시장에는 의도적으로 텅 빈 공간이 많다. 작가는 그 여백에 대해 말했다. "관람자들이 지나가면서 숨소리나 발걸음 소리로 채워보면 어떨까라는 마음으로 여백의 공간을 뒀습니다." 작품은 작가의 손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관람자의 신체와 호흡이 공간을 채울 때 비로소 전시는 완성된다.

사라진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2013년 전주 교동미술관, 2024년 전주문화재단 양화소록 레지던시를 거쳐 2026년 영은미술관 레지던시에 입주한 문민순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24년 만에 한국의 흙을 만졌다"고 했다. 파리의 작업실에서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며 '사라짐'을 사유하던 작가가, 오래된 고향의 흙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프닝에서 그는 "파리에서 사라짐에 대한 것에 계속 질문을 던지면서 명상하는 시간을 굉장히 많이 가졌습니다. 그 명상의 결과가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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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시간> 일부 2023-2026, Clay, smoke-fired, Dimensions variable


그 질문의 답이 지금 영은미술관 제2전시장 벽면과 바닥에, 그리고 한지 위에 고요히 펼쳐져 있다. 흙이 기억하고, 불이 새기고, 연기가 증언한 시간의 층위들. 그 앞에서 우리는 결국 이해하게 된다 — 사라진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우리 곁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전시는 5월 24일까지.

이상민 | 수석전문위원 · 미술인문학자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 통섭미술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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