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를 거부하는 축축한 몸 - 강채연 개인전 『Soft Temple』 심층 리뷰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1978)에서 이렇게 썼다. “환자들이 가장 깊이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한다는 고통이다.” 질병을 신비화하고 낙인화하는 언어의 함정을 폭로하는 것—그 직시(直視)의 용기야말로 손택이 20세기 인문학에 건넨 가장 날카로운 선물이었다. 손택은 투명성(Transparency)을 평생 추구했다. 질병은 질병일 뿐이며, 몸은 몸일 뿐이다. 해석이 몸을 왜곡하는 순간, 환자는 이중의 고통 안에 갇힌다.
2026년 6월, 서울 용산구 후암동 컴플렉스 2층. 그 좁은 골목을 지나 전시장 안에 오래 서 있는 동안, 나는 손택의 그 문장들이 몸 안에서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강채연의 『Soft Temple』은 정확히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질병을 둘러싼 은유를 걷어내고, 몸이 직접 발언하도록 놔두는 자리. 그것도 아름답지 않은 방식으로.
■ 어긋난 이름, 어긋난 몸
전시 제목이 먼저 어긋난다. 『Soft Temple』 - 부드러운 사원. 사원(Temple)은 성스러운 공간이지만 그 외형은 언제나 단단하고 수직이다. 화강암 기둥, 대리석 바닥, 직각의 계단. 그런데 그것이 ‘부드럽다’면? 이 모순적 조합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강채연은 제목 자체를 통해 이미 전시의 윤리적 입장을 선언한다. 성소(聖所)는 단단한 것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고.
김지윤 독립 큐레이터는 전시 서문의 첫 문장을 이렇게 연다. “오늘날 우리는 온전히 살아있음을 어떻게 느끼는가.” 이 물음은 수사적이지 않다. 오늘날 우리는 잠든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살과 근육의 비율, 뼈의 단단함과 스트레스 지수까지 — 화면 속 수많은 데이터로 몸을 안다고 믿는다.
“오늘날 우리에게 온전히 살아있다는 것은 어쩌면 감각이라기보다 데이터로 이뤄진 이성적 판단에 가까울 것이다. 데이터보다 빠른 고통이 몸으로 도착하기 전까지.” — 김지윤 독립 큐레이터, 전시 서문
이 문장이 전시 전체의 서막이다. 강채연은 바로 그 ‘데이터 이전의 몸’을 끌어올리는 작가다. 계측되기 이전의 몸, 최적화되기 이전의 몸, 낙인 찍히기 이전의 몸.
■ 재료가 곧 주장이다 - 바이오 물질과 디지털 이미지의 통섭
강채연은 말한다. “나는 몸을 직접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 흔적과 상상된 가능성들과 함께 작업한다.” 이 선언은 방법론이기 이전에 윤리다. 몸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남긴 것들과 함께 머무는 것.
그의 작업 방식을 이해하려면 재료를 먼저 봐야 한다. 젤라틴, 스코비(SCOBY; 콤부차 균막), 시아노타입 반응, 잉크젯의 흔적들. AI와의 대화로 생성한 이미지 위에 바이오(Bio) 재료를 더해, 비현실적 질병의 표면을 만들어낸다. 강렬한 색감과 거친 질감, 탈락한 막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언뜻 생명이 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색이 달라지고, 층이 조여들거나 풀어진다. 작품은 고정된 재현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존이 된다.
김지윤 큐레이터는 이 과정을 정밀하게 해부한다. 작가의 반복적 수행 - “붓고 뿌리고 휘젓고 말린 후 다시 붓고 휘젓는” 일련의 행위는 “데이터와 생명이라는 이분법적인 경계를 부드럽게 허물어 하나의 화면으로 길어 올리는 움직임”이 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통섭미술(consilience art)의 감각이다. 매체와 몸이, 디지털과 유기물이, 기억과 물질이 서로를 침투하며 하나의 감각장(感覺場)을 형성한다.
〈Reserved for Future Cases〉와 〈Epidermal Script〉 연작에서 이 방법론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AI가 생성한 이미지의 표면 위로 바이오 재료가 섞이고 뿌려지고 건조되며, 다공성(多孔性) 표면이 형성된다. 작품은 처음에는 지쳐 보이지만, 이내 그 구멍들 사이로 안과 밖이 만나는 장면이 펼쳐진다. 표면은 죽음과 생이 공존하는 막이 된다.
■ 두려움의 미학 — 작가가 마주한 약함
강채연을 단순한 ‘몸 정치학’의 실천자로 읽는 것은 이 작업의 깊이를 절반쯤 놓치는 일이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저에게 두려움은 안전 기지를 인지하게 만드는 감정인 것 같아요. 울타리를 벗어나 혼자서 배낭을 메고 유럽 여행을 하고,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생각보다 저에게 두려움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제 작업들은 약한 부분들을 똑바로 마주해 보는 시간을 전달하며 이를 해소해 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아이러니하죠.” — 강채연 작가 인터뷰
이 고백은 작업의 성격을 완전히 재정의한다. 강채연의 작업은 외부를 향한 비판 이전에, 내부를 향한 직면이다. 두려움을 통과해 살아남은 자의 기록. 바로 그것이 이 작업이 단순한 신체 비판론이나 선언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나아가 작가는 배우로서 독립영화에 참여하며 감정의 층위를 넓혀가고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배우로서 갖는 감정적인 색채를 회화 작업에 섞어서 지금보다 감정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내러티브와 인물이 직접 드러나지 않는 그의 회화가 오히려 더 짙은 감정적 잔향을 남기는 것은, 억제와 우회의 긴장감 때문이다. 감정은 재현되지 않고 물질에 스며든다.
또한 작가는 일상에서 음악을 줄이고 버스 소리, 사람들의 대화, 자연의 소리에 집중하며 생활 패턴을 조율한다고 말한다. “불필요한 것들은 줄이고, 여유를 남겨두는 것으로.” 이 감각적 절제가 작업의 밀도를 만든다. 과잉 이전에 침묵이 있다.
■ 식용(食用)의 경계 — 『Skinscape』와 『28 days skin』
『Skinscape』와 『28 days skin』 연작에서 탈락된 막의 문제는 더욱 첨예해진다. 막 또한 모두 먹을 수 있는 바이오 재료로 형성되었다. 스코비, 젤라틴, 식용 색소. 김지윤 큐레이터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 ‘식용성(edibility)의 의미’다.
우리가 먹는 것은 소화기관을 거쳐 몸의 일부가 될 수 있지만, 때로는 제대로 흡수되지 못하고 배출되거나 염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몸 안팎의 경계를 통과하면서 흡수와 거부, 공생과 탈락의 반응을 동시에 발생시키는 것. 이 바이오 재료들은 스스로 형태를 바꾸며, 막을 만들고, 얼룩을 남긴 후 다시 작품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이것이 손택이 말했던 바로 그 지점이다. 몸의 고통은 언제나 사회적 낙인의 언어로 번역된다. 자가면역 반응, 호르몬의 변화, 아동기의 각인, 몸속에 가라앉아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감염들 — 이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존과 부재 사이 어딘가에 머문다. 강채연은 그 번역을 거부하고, 몸이 직접 말하도록 놔둔다. 식용 재료가 된 막은 몸과 작품, 섭취와 배출, 생과 사의 순환 안에서 주체가 된다.
■ 탈락된 자들의 성소 — 큐레이터 서문이 건네는 정의
이 전시의 비평적 핵심은 김지윤 큐레이터의 서문에 이미 응축되어 있다. 그 정의를 그대로 가져오고 싶다.
“따라서 『Soft Temple』은 여성의 부드러운 몸을 찬양하는 신전이 아니다. 오히려 정상성이라는 하나의 완벽하고 고결한 여성성에서 이탈된 축축한 몸, 탈락되고 오염된 몸 안팎의 존재와 만나는 사원이다. 이 사원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날카롭지 않다.” — 김지윤 독립 큐레이터
축축하다. 오염되었다. 탈락되었다. 이 단어들은 통상 미술관에서 쓰이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채연은 바로 그 언어들을 끌어안는다. 질병을 앓는 여성의 몸 — 질염, 다낭성 난소 증후군, 기형종 — 은 정상성에서 이탈한 결함이 아니라, 몸 그 자체가 이미 생과 사, 증식과 손상, 정체와 흐름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원임을 드러내는 매개가 된다.
이 사원에서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얼마나 딱딱하고 투박하며 감각적으로 무지하게 나뉘어 왔는지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는 작가의 감각은 결코 이분법적이거나 차갑지 않다. 여러 색이 섞이고, 젖고, 흐르고, 무너지며 물컹거리는 강채연의 작업은 데이터 밖의 무수한 존재와의 호흡을 드러낸다.
■ 취향의 자리에서 - 컬렉터와 감상자에게
나는 컬렉터 교육 현장에서 늘 이렇게 말한다. 좋은 작품은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설명 이전에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안목(眼目)은 지식이 아니라 감각이 먼저다.
강채연의 작업은 그 느낌이 불편한 쪽에 가깝다. 아름답다기보다 불안하다. 완결되어 있다기보다 계속 변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이 작업의 힘이다. 우리는 너무 오래 미술관에서 정돈된 아름다움을 소비해 왔다. 강채연은 그 소비 구조 자체를 작업의 재료로 삼는다. 디지털이 이상화하는 몸, 사회가 규범화하는 여성성, 그 바깥에서 축축하게 살아가는 실제의 몸들.
통섭미술(consilience art)의 관점에서 이 작업은 매체론, 신체론, 페미니즘 비평, 생명과학적 상상력이 교차하는 드문 성취다. 어느 하나의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 작업의 가장 큰 미덕이다.
■ 프라하에서 런던까지 — 국제 무대 위의 강채연
2026년, 강채연의 이름은 여러 곳에 동시에 있다. 프라하 Fotograf Zone에서의 『28 days』, 뉴욕 Fugue Gallery의 단체전 『Future Forward』, 그리고 런던 arebyte digital art center의 스크리닝. 그 한가운데 서울 갤러리 컴플렉스의 『Soft Temple』이 있다.
서울문화재단의 2026년 예술창작활동지원 선정 작가. 그것은 제도적 인정이지만, 이 전시는 그 인정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제도의 언어가 포획하지 못하는 몸의 감각들을 끌어올리는 작업이다.
강채연(b.1999)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영국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현대미술을 공부했다. 1999년생. 이제 막 세상과 자신의 몸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한 나이다. 그런데 그 발언이 예사롭지 않다.
■ 손택의 유산, 강채연의 응답
손택은 말했다. 질병을 신비화하는 언어를 쫓아내야 한다고. 그것은 단순히 의학적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몸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다. 손택의 ‘투명성’ 추구는 궁극적으로 편집증적 사회 — 질병을 은유로 삼아 공포를 조장하는 사회 — 를 향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강채연은 그 비판을 2020년대의 언어로 번역한다. 디지털 문화가 여성의 몸을 최적화된 이미지로 소비하는 방식, 데이터가 감각을 대체하는 방식, 정상성의 언어가 몸을 낙인찍는 방식. 그 모든 번역에 저항하며, 몸이 직접 말하게 한다. 축축하게. 불투명하게. 물컹거리게.
손택은 투명성을 평생 추구했다. 강채연은 그 투명성을 미술의 언어로 실천한다. 다만 투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 몸의 감각 그 자체로.
『Soft Temple』은 성소(聖所)다. 완벽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탈락하고 흘러넘치고 오염된 몸들을 위한 성소다. 그리고 그 성소에서 우리는 오래 서 있어야 한다.
【전시 정보】
강채연 개인전 『Soft Temple』
기간: 2026. 6. 9(화) – 6. 27(토)
장소: 컴플렉스 2층, 서울 용산구 후암동 59
관람: 화–토 11:00–18:00 (월·일 휴관)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작가: @cynk.l
【필자 소개】
이상민은 연세대학교에서 수학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커뮤니케이션 연구자이자 미술인문 작가다. 현재 비영리단체 한국작가후원연대(KASC) 이사장, 전략기획 컨설팅펌 이노바랩(주) 대표를 겸하고 있다. 통섭미술(consilience art) 이론을 정립하고 『통섭미술관기행』 『통섭미술 취향의 기록』 『아티스트 코드 80』 『컬렉터스 코드 80』 등 통섭미술 시리즈를 저술했다. 최근에는 『취향과 안목 왜 AI를 이기는가』 『통섭과 협업 AI 이후 인간의 전략』을 출간했으며, 대학 평생교육원 미술인문학 강의, 갤러리 아트살롱 운영, 전시 기획 등을 통해 예술과 비즈니스의 접점을 연구·실천하고 있다.
@iartnoori





